2020/04/17

[칼럼]’N번방 집단성착취 사건’과 회복적 정의_정용진

정용진 (KOPI 회복적정의연구소)

모든 분노의 감정에는 불의에 대한 인식이 내포돼 있습니다. 말하자면 분노는 단순한 내적 감정이 아니라 정의를 향한 강력한 요구의 발로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아니 온 나라가 여성을 향한, 그것도 미성년 아동을 대상으로 자행된 성착취, 디지털 성폭력 사건을 목도하며 분노하고 있습니다. 각자가 느끼는 분노의 강도는 불의한 현상에 대한 인식, 나아가 이를 바로잡고자 하는 정의의 열망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이 쏟아내는 분노와 정의의 요구는 가해자에 대한 강력한 처벌에 맞춰져있습니다. 인간사회에서 도덕적으로나 현행법적으로나, 인류애의 보편적 측면에서도 도저히 용인될 수 없는 이런 류의 행위는 단죄되어 마땅합니다. 그러나 범죄자에 대한 처벌은 정의를 이루는 필요조건이 될 지는 몰라도 충분조건이 되기는 어렵습니다. 다시 말해, 가해자 처벌은 반드시 필요하나 여기서 그친다면 이는 반쪽짜리 정의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정의라는 말의 본래 함의를 들여다보면, 고대 히브리어 어원적 의미(‘Sedeq’,’Tnankh’) 로는 “바르게 자리매김한다” “본래의 좋은 상태로 되돌린다”는 회복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정의는 어떤 올바른 모습을 훼손한 가해자만을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훼손된 상태, 즉 피해자와 그 피해상황이 온전히 회복될 때 비로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가해자 처벌만이 아니라 피해자의 온전한 회복이 이루어질 때 정의는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의 언론보도와 대중의 관심은 주로 가해자에게 맞춰져 있습니다. 가해자가 누구이며, 어떤 짓을 저질렀는가부터, 과거 생활전력, 친분관계, 학교성적, 가정생활까지 전방위적으로 가해 행위자의 면면을 파헤치고 있습니다. 국민의 알권리도 중요하고, 끔찍한 범죄자의 신상을 공개함으로써 잠재적 범죄행위에 대한 억지효과와 사회적 경종의 의미도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보도행태는 정의에 대한 사람들의 관점과 관심을 가해자에게만 맞추도록 강제하고 가둬 놓기에 많은 우려를 낳습니다. 사람들은 가해자가 얼마나 나쁜 사람이고 비정상인지를 확인하고 싶어합니다만, 가해자 악마화는 문제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번 사건을 자행한 조주빈은 악마와 같은 일을 저지른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문제를 그가 악마이기 때문에 발생했다는 식으로 인식한다면, 사건의 본질과 근본적 원인을 파악하기 어렵고, 이런 범죄를 저지르는 개인들을 양산해 내는 사회적 구조를 들여다보기 어렵습니다.

가해자를 집중하는 보도행태는 정반대로 가해자를 영웅화하는 효과도 갖습니다. 그의 주도면밀함이나 학생시절 성적, 비상한 머리나 심지어 외모까지도 누군가에게는 모방범죄를 위한 동경의 대상이자 우상으로 비칠 수 있습니다. 그러는 사이 피해자는 더욱 고립되고 소외되며 사회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압박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저지른 행위에 대해 분노하고 처벌을 요청하면서도 한 개인을 악마화하여 모든 원인을 개인에게 환원해서는 안되며, 동시에 가해자에게 기울이는 관심 이상으로 피해자의 회복에 대해 관심을 갖고 목소리를 높여야 합니다. 가해자의 형량을 높이려는 노력만큼 피해자 회복을 위한 기금마련과 실질적인 구제방안, 공동체 안에서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구조와 여건마련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회복적 정의는 가해자의 처벌을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회복적 정의는 가해자가 자기행위에 합당한 책임을 져야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그 책임을 통해 반드시 피해자와 공동체의 회복과 치유가 이루어져야 정의가 성취된다고 믿습니다. 처벌도 가해자가 지는 책임의 한 형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반드시 피해자와 공동체가 받은 상처와 아픔, 피해와 고통이 해소되고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위해서는 몇가지 조치가 필요합니다. 첫째, 본 사건을 올바르게 명명해야 합니다. 둘째, 사건을 바라보며 해결을 바라는 사람들의 질문의 방향이 달라져야 합니다. 셋째, 가해자와 피해자가 받고 있는 수치심을 다루어야 합니다.

첫째, 본 사건은 ‘N번방’사건과 같이 중립적으로 불릴 수 없습니다.
사건이 사람들 사이의 흥미나 가십거리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사건이 일으킨 피해를 적확히 지적하는 이름이 필요합니다. 가해자가 자기 과시적으로 지은 ‘박사’라는 닉네임을 부르는 대신, 골방에 숨어 흉악한 일을 저지른 ‘조주빈’이라는 초라하고 비열한 범죄자의 이름을 불러야 하는 것처럼, 사건을 올바르게 해결하고 문제의 본질을 드러내는 이름짓기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본 사건은 ‘N번방’ 사건이 아니라 몇몇 언론들의 결의대로 ‘집단 성착취 영상거래사건’ 혹은 ‘디지털 성착취 사건’이라 불러야 합니다. 이를 통해, 사건의 본질을 드러내고 피해자가 어떤 피해를 입었는지, 어떻게 해야 피해가 최소화되고 회복될 수 있는지 생각할 수 있어야 하며, 이를 가해자(들)를 호명하고 소환하여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둘째, 질문의 방향을 바꾸어야 합니다.
앞서 지적한 대로 가해자 처벌중심의 정의관에서는 “누가 가해자인가?”, “어떤 죄를 저질렀는가?”, “어떻게 가해자를 처벌할 것인가?”가 주된 질문으로 부각됩니다. 동시에 피해자에 대한 공격적 질문도 동반됩니다. 피해자는 “왜 제안에 응했는가?”, “왜 사진을 보냈는가?”, “왜 돈을 받았는가?” 이같은 질문은 피해자에게 원인제공의 혐의를 씌우고 피해자가 잘못했기에 결국 그만한 일을 당할만 했다는 인식을 사람들에게, 심지어 피해자 자신에게 심어줍니다.

가해자 처벌을 중심에 두는 응보적 정의관에서는 사람들이 쉽게 자신을 양측 가운데 선 심판관의 역할로 상정하고 누가 더 잘못했는지, 각각은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를 따지고 그에 따라 상응하는 처벌이나 비난을 안겨주려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관점과 질문은 어떻게 하면 발생한 피해가 회복될 수 있는지, 특별히 피해자에게 지금 당장, 그리고 미래를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 묻는 쪽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다시 강조하건대, 가해자에 대한 처벌 수위와 방법을 묻는 질문, 피해자를 향한 비난과 원인제공에 대한 공격적 질문을 탈피하고, 이제 피해자의 회복과 이를 위한 가해자의 책임을 묻는 질문으로 방향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누가 어떤 피해를 입었는가?”, “어떻게 피해를 해결 혹은 회복할 것인가?”, “가해자는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가?”, “공동체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셋째, 피해자와 가해자에게 부과되는 수치심을 잘 다루어야 합니다.
호주의 범죄학자인 존 브레이스웨이트(John Braithwaite)는 낙인찍는 수치심(Stigmatized shame)과 재통합하는 수치심(Reintegrative shame)을 나누면서, 범죄자에게 비난과 경멸, 처벌을 주어 낙인찍는 수치심을 안기면, 잘못을 뉘우치고 반성하는 죄책감을 느끼기보다 오히려 이를 자기 자아에 대한 비난과 공격으로 받아들여 이러한 사실을 거부하고 부정하기 위해서라도 가해자는 폭력성을 증가시킨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는 오래도록 인간의 폭력을 연구한 미국의 정신과의사인 제임스 길리건(James Gilligan)도 동일하게 밝힌 부분입니다.

수치심을 부정적으로 다루면 폭력성이 증가합니다. 어쩌면 가해자는 수치심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아왔는지 모르고, 열등하고 무가치하게 여겨지는 자신의 실재에 대한 방어기제로 폭력성과 허세로 위장하고, 텔레그램 세계에서 신의 위치를 만들어왔는지 모릅니다. 대개의 범죄자들은 평생을 이런 패턴을 연습하 듯 살아갑니다.

수치심은 자아에 대한 감정이고 죄책감은 타인에 대한 감정인데, 수치심에 허덕이는 사람은 자신에만 몰두하기에 타인의 감정을 헤아리는 죄책감을 느낄 수 없습니다. 가해자에게 비난과 경멸, 공격과 욕설 또한 강력한 처벌을 통해 수치심을 안기려 하면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가해자는 자신의 행동으로 피해를 입는 타인, 즉 피해자의 고통과 공동체에 안긴 피해를 반성하고 뉘우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공격받는 자아를 위한 방어와 보복에만 몰두하게 됩니다.

또한 피해자 역시 극도의 수치심을 느끼는 상태에 있습니다. 피해자는 자신의 의지에 반해 가해자에게 강압당했고, 굴복되었습니다. 자신의 신체와 정신, 영혼이 파괴되어서 근원적으로 연약하고 불완전한 존재로 인식하며 자신을 한없이 무가치하게 여기는 수치심의 상태에 도달하게 됩니다. 또한 이를 드러내거나 받아줄 공동체가 없을 때 더욱 고립되고 사회적 시선이 적대적으로 느껴져 스스로 숨어드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집니다.

본 사건을 다루는 우리의 태도가 가해자 처벌에만 일관할 때, 가해자는 뉘우침과 죄책감의 내면의 변화를 이루지 못한채 공격성과 폭력성을 증가하게 되고, 피해자는 회복되지 못하고 방치된 채 사건이 야기한 모든 피해를 홀로 짊어져야 할 뿐더러 훼손되고 파괴된 존재와 수치심의 상태에서 더욱 더 고통을 받게 됩니다.

가해자에게는 단순히 비난하고 욕하는 것, 처벌을 안기는 것을 넘어서 그들의 행동이 만들어낸 결과, 즉 피해자와 공동체의 아픔과 고통을 직접 전달하고 보여줌으로써 그에 대한 합당한 책임을 요구해야 합니다. 이로써 피해자에 대한 공감을 기반한 올바른 수치심 즉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과 죄책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또한 피해자에게는 그들이 겪는 아픔이 자신들의 잘못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받는 안전한 공간이 주어져야 합니다. 무언가 잘못해서 이런 비극을 겪은 것이 아니라 범죄자의 덫에 걸린 것이라는 사실과 그대들은 여전히 가치 있고 사랑받는 존재라는 진실이 공동체를 통해 전해져야 합니다. 공동체가 이들의 아픔을 알고 함께 회복을 위한 길을 걷겠노라는 응답이 직접적으로, 가까이에서, 지속적으로 들려져야 합니다.

강력한 처벌로 본보기를 삼는 일이 향후 잠재적 범죄에 대한 억지효과가 될 수는 있으나 처벌은 응징 자체로서가 아니라 반드시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 즉 피해자 고통의 회복의 측면에서 수행될 때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강력한 가해자 처벌의 본보기가 필요하다면, 동시에 강력한 피해자 회복의 본보기가 보여져야 합니다.

더이상 이런 끔찍한 일이 재발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가해자 한사람 혹은 소수의 범죄자와 가담자에게만 관심을 기울이지 말고, 74명의 피해자, 나아가 모든 피해자의 회복에 사회와 제도의 관심과 지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국민적 공분이 피해자 회복을 위한 실질적 논의로 이어지기를 기대 합니다.

‘범죄가 있으면 반드시 처벌이 따른다’는 공식은 정의에 대한 우리사회의 일반적 상식입니다. 그러나 이것는 반쪽 짜리 정의입니다. 이제는 공식을 새로 만들어야 할 때입니다. ‘범죄로 인한 피해는 반드시 회복된다.’ 이러한 회복적 공식이 국가와 공동체를 통해서 만들어질 때, 진정한 정의가 이루어 질 것입니다. 이번 사건의 피해를 입은 많은 여성과 그들의 가족과 공동체의 회복을 기원하고 함께 행동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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