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4/14

[칼럼]인디지너스와 트라우마 힐링 그리고 회복적 정의_정용진

정용진 (KOPI 회복적정의연구소)

*본 칼럼은 ‘Peace Building Story 2019 가을호’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이번 편지는 캐나다에서 보내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지난 9월 2일 그간의 캐나다 생활을 마무리하고 귀국하였습니다. “세월이 살같이 빠르다”는 말을 누구나 어느 상황에서건 흔한 수사로 쓰는데, 제겐 그 의미가 절실히 다가오는 한 해였습니다.

오늘은 트라우마와 회복적 정의의 관계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회복적 정의의 운동과 개념이 40여 년 전 캐나다에서 인디지너스의 정의 개념과 문화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듯이, 현대의 트라우마 접근 또한 인디지너스의 상처의 경험과 그것을 치유해 나가는 그들의 고유한 방식을 통해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인디지너스(Indigenous people), 즉 캐나다 토착민들은 유럽에서 건너온 백인 정착민들에게서 역사적으로 크나큰 상처와 수탈을 경험했습니다. 일제 36년간 민족적 수탈을 경험한 우리로서는 이들의 아픔을 공감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토착민 치유재단(Aboriginal Healing Foundation-AHF)의 조사에 따르면, 전 세계 인디지너스 공동체는 정신적, 정서적, 물리적으로 많은 상처를 공통적으로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중 가장 비극적인 사건은 1870년부터 1996년까지 무려 100년 넘게 자행된, “인디언 기숙학교(Indian Residential School)” 제도를 통한 문화말살 정책입니다. 진실과 화해 위원회(TRC)는 밝히기를, 적어도 15만 명의 원주민 아이들이 가정과 공동체에서 기숙학교로 끌려갔습니다. 이들은 이곳에서 자신들의 고유한 언어사용을 금지당하고 오직 영어로만 말해야 했으며, 원주민들의 고유한 문화, 가족, 공동체와 완전히 단절된 채 유럽 문명의 근대시민이 되도록 강제로 교육받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정서적, 신체적, 성적 학대가 학교 관계자로부터 이루어졌습니다. 더 충격적인 것은 이 학교의 운영은 캐나다 주 정부에서 캐나다의 주요 기독교 교단에 위탁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당시를 회상하는 인디지너스의 예술 작품을 보면, 학교를 운영하던 신부와 수녀, 목사와 교사들을 악마처럼 묘사한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종교가 국가의 편에 서면, 종교적 신념과 가르침마저 국가의 지배 논리에 따라 변질하고 심지어, 국가의 이름으로 반종교적 행위를, 그 종교인들이 스스로 저지르게 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런 끔찍한 상황이 들려오자 인디지너스 부모 중 자녀의 안전과 문화의 보존을 위해 학교 보내기를 거부하면, 부모 역시 감옥에 가거나 식량 배급을 중지하겠다는 위협을 받아야 했습니다. 기숙학교 자체로도 엄청난 트라우마와 상처를 남겼지만, 이후에 세대 간의 단절이 생기고, 문화적 정체성과 공동체가 파괴되는 돌이킬 수 없는 상태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기숙학교로 보내진 아이들은 부모의 언어도, 그들의 생존 방식과 문화도 알지 못했고, 그렇다고 유럽 백인들의 주류사회에 편입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사회 하층민으로 남아, 정부에서 주는 적은 보조금과 배급에 의지해, 그들이 설정해 놓은 “보호구역”에서 목숨을 연명하는 처지가 된 것이지요. 한때 그 광활한 땅의 주인이자, 신이 창조한 세계에서 하늘과 땅, 동물과 식물, 바위와 흙의 친구요, 친척으로 자신을 여기며, 우주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 살아온 그들이 이제는 깊은 상처를 안고, 인간으로서의 위엄도, 공동체의 지혜도 모두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저는 인디지너스의 역사와 삶을 보면서, 어쩌면 한국 사회 역시 서구 문화와 근대화라는 정복자들에게 상처 입은 거대한 인디지너스들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에게는 더는 우리를 지배하는 외부 정착민들(서구 열강, 일제)은 존재하지 않지만, 우리 고유의 문화와 언어가 오염된 채, 지속적으로 외부의 영향을 받는다는 면에서 비슷한 감정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처에도 불구하고 인디지너스는 조금씩 회복의 길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다행히 서구사회 역시 과거사 문제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 화해와 회복을 위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원주민들 입장에서는 서구인들이 가진 세계관의 근본적인 한계 때문에 이들의 치유행위가 온전한 회복에 이르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인디지너스 학자들은 비판하기를, “(서구인들의) 의학적 접근은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힘이 작동하는 더 넓은 측면, 즉 구조적 폭력이라는 측면을 간과한다.”고 말합니다. 서양에서는 근대주의의 산물로 사물을 개별적 존재로 여기기 때문에, 환자와 질병을 사회적, 문화적 맥락에서 떼어낸 뒤 오직 병리학적 치료 대상으로만 바라보고 주로 문제 해결적인 관점에서 다양한 의료행위를 시도해 왔습니다. 반면 인디지너스의 치료는 기본적으로 전인적, 관계적, 공동체적 측면에서 이루어집니다.

이는 세계관의 차이 때문인데, 서구 과학자들은 사물을 볼 때, 기본적으로 물질 중심적으로 보지만, 인디지너스는 물질 사이의 관계에 더 집중합니다. 예를 들어, 식물을 연구한다고 할 때, 서구 과학자는 개별 식물을 외향적, 내부적 특징과 구조를 분석하는 쪽으로 발달해 있고, 원주민들은 개별 식물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요소, 다른 동식물, 토질 같은 생존 조건과의 관계를 더 들여다봅니다. 이런 생각은 사물을 전인적으로 바라보는 원주민들의 독특한 세계관을 반영합니다. 이들이 보기에, 모든 물질은 생명을 품고 있고, 상호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 뒤얽혀 모든 것은 서로에게 영향을 줍니다. 따라서 개별적인 것의 건강한 상태는 전체의 균형과 조화와 맞물려 있습니다. 영혼과 육체, 이성과 정서가 균형을 이룰 수 있어야 비로소 건강한 회복과 치유의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트라우마의 치유는 희생자 내면의 상처나 회복만의 문제가 아니라, 즉 개별적 존재의 치유는 반드시 사회-정치적 맥락이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인간을 포함한 자연의 모든 것을 통합되고 연결된 관계망의 세계로 인식하는 인디지너스에게는 당연합니다.

원주민 보호구역에서 상처받은 이들 집단의 치안문제와 트라우마 치료에 깊이 관여한 백인 검사 루퍼트 로스(Rupert Ross)는 원주민의 세계관이 반영된 공동체 중심의 힐링서클에 참여한 후 그 효용을 다음의 네 가지로 정리했습니다.

첫째, 서클 안에서는 자신의 상처를 들어줄 사람이 있다. 또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기 자신에 대해 깨닫게 된다. 서클에 참여하기 전에 트라우마의 희생자들은 자신들을 더러운 존재로 여기고, 외롭고, 두려움만을 느꼈지만, 서클 안에서 다른 이들의 상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의 이러한 반응은 극단적인 상황을 경험한 다른 사람들의 반응처럼 지극히 정상임을 깨닫는다.
둘째, 서클은 자신이 받은 학대의 경험과 두려움, 수치심을 나눌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을 제공한다. 때로 자신의 연약함을 노출하면 이내 그것이 공격의 빌미가 돼 곤 하지만, 서클 에서는 연약함은 존중받고, 품어주고, 신뢰하며, 돌봄의 대상이 된다.
셋째, 스토리텔링이 잠재적인 힐링 프로세스로 작동한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이야기를 함으로써, 사람들은 비로소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하고 믿고, 느끼고, 관계 맺는 법을 배우게 된다.
넷째, 스스로 자신의 치료의 길을 찾게 된다. 서클 안에서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의 고통에서 빠져나오는 법과 스스로 도울 길을 찾는다. 전통적 가르침에서는 사람은 모두가 고유하고 모두가 지혜를 지녔다. 그러므로 서클을 통해서 사람들은 타인을 통해 한때 자신이 트라우마로 잃어버렸던 힘과 권한을 되찾는다.
또한 서양의 심리학적 접근은 자율권, 주도권, 능력과 정체성 등 개인의 역량을 높이는 부분을 트라우마 치료의 핵심으로 삼았지만, 원주민의 치유전통은 가족과 공동체, 자연 세계와의 건강한 재연결을 돕는 것을 치유로 보았습니다. 그 때문에 대부분의 원주민 전통에서 치유행위는 집단으로 이루어지며 공동체적 요소가 강조됩니다. 개별 환자의 문제가 아니라 창조된 자연 세계 안에서 각자가 쓸모 있는 제 역할로 돌아가도록 돕는 것을 치유로 보는 것이지요. 그래서 서클의 방식이 자연스럽게 치유과정에 녹아든 것입니다. 반면, 서양의 트라우마 치유의 교과서 수준의 위상을 갖는 쥬디서 허먼(Judith Herman) 의 Trauma and Recovery에서도 치유자와 환자의 힘과 권위, 위계와 신분의 불균형을 지적하고 이를 경계하라고 말합니다. 이미 서구의 트라우마 치유에는 환자와 치유자라는 이분법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오늘날 서구사회 역시 과거의 근대주의와 과학주의적 사고에 영향을 받은 개별적 접근만이 아니라 통합적, 공동체적 이해를 늘리고 있습니다. 또한 트라우마 치유를 회복적 정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흐름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임상심리학자 제임스 길리건(James Gilligan)은 그의 명저 Violence에서 “모든 폭력은 정의를 실행하려는 노력이거나, 불의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대해 하워드 제어 교수는 “갈등해결과 트라우마 치유 프로세스는 반드시 정의와 불의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그 때문에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회복적 정의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트라우마 치유에 대한 서구식 의학적 접근의 한계를 사회-문화적 맥락과 연결 지우고 특별히 트라우마의 발생시킨 정의와 불의의 측면을 강조한 것입니다. 특별히 회복적 정의는 단지 방법론만이 아니라 그 속에 “존중, 겸손, 격려/힘 북돋우기, 참여”의 가치가 담겨 있기 때문에 더욱 치유 과정에 유의미한 요소로 자리한다고 말합니다. 상호연결성이라는 이 회복적 정의의 가치는 앞서 살펴본 인디지너스의 기본 세계관과 일맥상통합니다.

하워드 제어에 따르면, 트라우마의 근본 뿌리에는 혼돈과 무질서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피해자가 되면, 주로 자신은 누구인지, 누구를 믿을 수 있는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어떤 곳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하게 됩니다. 혼란스럽고 무질서해졌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세계의 기둥을 세워 인생을 건설하는데, 어려서부터 성인이 되기까지 자신의 삶을 지탱하는 이 세 기둥을 지속해서 만들어갑니다. 이것은 1) 세상의 질서와 안정, 2) 자율성과 통제, 그리고 3) 관계성입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를 둘러싼 사회관계망 속에 녹아있습니다. 그러므로 하워드 제어는 트라우마 피해자는 소위 “three d’s” 의 상태에 있다고 합니다. 즉 disorder, disempowerment, disconnection(무질서, 무기력, 단절). 따라서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치유하는 과정은 잃어버린 이 요소들을 회복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empowerment, order, connection(권한부여, 질서, 연결)의 기둥의 회복을 말합니다. 어려서부터 트라우마에 노출된 사람은 이 세 가지 기둥을 구축하는 데 어려움을 겪거나 왜곡된 방식으로 실현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면서, 타인을 지배함으로써 자율성을 획득한다거나, 폭력과 힘을 기초로 질서를 잡거나, 타인에 대한 불신을 기초로 친밀감을 다지거나 오직 자신과 같은 “아웃사이더”하고만 친밀성을 유지한다든지 하는 모습입니다.

정리하면, 트라우마 치유는 결국 이 세 가지 기둥을 재건하는 과정인데, 이것이 타자로서의 치유자에 의한 개별적 의료행위로서가 아니라, 나와 연결된 이웃과 친척으로서의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워드 제어는 또한 “개인이나 공동체의 스토리텔링은 갈등전환과 트라우마 힐링, 회복적 정의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그러므로 프로그램의 전 과정에 스토리텔링의 기회가 체계적으로 마련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종합하면 우리는 트라우마의 치유는 공동체적 형태 속에서 스토리텔링의 방식을 담아내는 인디지너스 전통의 서클 방식이 적합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끝으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습니다. 서클 방식은 그 자체로 완전하지 않으며, 만일 위에서 언급한 가치가 반영되지 않고, 안전한 장치가 없다면 오히려 어떤 위험성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제시카 세네히(Jessica Senehi)라는 학자는 분별없는 스토리텔링의 위험성과 한계를 지적하면서, 우리가 스토리텔링을 생각할 때 이를 “파괴적 방식”과 “건설적 방식”의 두 가지로 구분해서 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제시카 박사는 “파괴적 스토리텔링은 힘으로 강압하고, 배제를 자행하며, 상호 인정이 부족하고, 부정직하고, 대화를 통한 서로의 인식이 부족”합니다. 파괴적 스토리텔링은 대화를 할수록 불신이 지속되고 부정이 강화됩니다. 반면 건설적 스토리텔링은 포용적이고 협력하고 상호 인정을 촉진합니다. 열린 대화의 기회를 만들고, 서로에 대한 이해의 단초를 주며, 어려운 문제도 수면위로 끌어올립니다. 이런 스토리텔링은 이해와 수용을 높이고, 서로가 목소리를 내도록 돕습니다.”
저는 특별히 서클 방식이 단순히 관계 형성을 돕고 서로를 알아가는 차원이 아니라, 정의와 부정의, 굴욕감과 수치심, 상처와 울분이 뒤섞인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스토리텔링의 과정으로 쓰일 때는, 이 서클의 방식이 파괴적으로 흐르지 않고 안전하고 지속적으로 건설적인 대화의 장으로 남도록, 반드시 회복적 정의의 틀거리 안에서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의가 요청된다고 해서 가해자에 대한 비난과 공격, 혹은 피해자의 재피해자와 및 분노와 원망이 복수로 이어지는 가해자화의 과정을 서클이라는 형태로 담아서는 안 되며, 이를 회복적 정의와 회복적 질문으로 안전하게 전달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워드 제어가 정리하고 제시한 회복적 질문의 기초를 다시 상기하는 것으로 이번 긴 편지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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