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4/13

[칼럼]회복적 정의로 만난 광주의 5월_서동욱

서동욱(KOPI 회복적정의연구소)

*본 칼럼은 ‘Peace Building Story 2019 여름호’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5월을 앞둔 광주에서는 매우 뜻 깊고 소중한 자리가 마련되었다. 성 프란체스코 평화센터, 5.18 기념재단, 광주평화나비, 한베평화재단에서 주최한 광주평화기행워크숍에서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의 피해자와 가해자가 39년 만에 처음으로 만나 5월의 그 날을 함께 증언하는 자리를 가졌다. 이 대화모임은 당사자들의 안전을 위해 비공개 모임으로 진행이 되었다. 한국에서 발생한 국가 폭력과 역사적 갈등의 당사자들이 만나 이야기를 나눈 최초의 ‘회복적 대화’가 아닌가 싶다.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 주남마을에서는 지나가는 버스를 향해 계엄군이 총을 쏘는 일이 발생했다. 버스에 타고 있던 18명 가운데 단 한 명이 살아남았다. 그 유일한 생존자 홍금숙씨는 이날 대화모임에서 당시 부대에 소속되었던 계엄군 최oo 씨를 만났다. 이 모임에는 제주 4.3사건 유족, 여순사건 유족, 그리고 베트남전쟁 참전 군인이 함께 자리하여 5.18 증언 이외에 또 다른 역사를 경험한 당사자의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전체 워크숍 일정 중 경험자로서 당사자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은 KOPI 이재영 원장의 대화모임 진행 가운데 서동욱 팀장(KOPI), 현승민 국장(KARJ), NVC 박성일 선생이 보조진행의 역할로 참여했다.

새벽 서울에서 출발한 진행팀은 오전 이른 시간 광주에 도착했다. 당사자 대화모임에 앞서 진행팀의 첫걸음은 망월동 5.18 민주묘역으로 향했다. 우리는 그곳에서 최 씨를 처음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주최 측과의 면담을 통해 이 대화의 자리를 제안 받고 처음에는 거절했었다. 하지만 돌아서 생각해보니 자신의 진실이 5.18 당시 죽어간 사람들의 넋을 위로하고 산 사람들의 삶과 5.18운동에 작은 도움이나마 될 수 있다면 참여하겠다하여 승낙을 했다. 선뜻 결정을 했지만 만남의 날까지 20여 일 동안은 잠을 푹 못 이루며 자신이 참여해도 되는지, 만나면 무슨 이야기부터 해야 하는지 등 수많은 고민을 해왔다. 이날도 그는 결국 잠을 거의 못 자고 왔다. 그의 광주에서의 첫 행보는 망월동으로 향했다. 누군가의 묘역 앞에 서서 사연을 듣고 눈을 감는 그는 짐짓 무엇을 떠올렸을까.

오후에 진행된 대화모임에는 전국 각지에서 모인 20여 명의 워크숍 참여자들이 자리했다. 뿐만 아니라 주남마을 사건의 유가족과 5.18민주화운동과 관련한 광주시민들이 10여 명 참여하였다. 대화는 증언석이 따로 없이 서클로 진행되었다. 안쪽 서클에는 역사의 경험자인 당사자들이 이야기하고, 바깥 서클에는 모든 참여자가 둘러앉아 이야기를 듣는 이중의 어항서클로 대화모임이 진행되었다. 당사자들은 이런 대화방식으로의 증언이 처음이라며 낯설어했지만 이내 대화는 모든 이들의 경청 가운데 깊이 빠져들었다.

처음으로 토킹스틱을 받은 최 씨는 사죄를 표하며 광주에 오기 참 힘들었다며 말을 한참을 못 이었다. 그는 당시 제대를 10여 일 앞둔 청년 군인이었다. 자신이 직접 사격을 한 건 아니었으나 학살된 현장과 가깝게 있었고 주남마을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일부를 암매장한 것을 목격한 군인이었다. 그는 1989년 청문회 당시의 상황을 증언한 최초의 계엄군이기도 했다. 청문회 증언 이후 그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그는 광주시민들에게는 가해자요, 공수부대원들에게는 배신자의 낙인으로 살아오면서 애써 자리 잡은 직장을 잃었고 정치활동의 오해를 받기도 했다. 그는 자신과 같이 양심 증언을 하는 용기 있는 계엄군이 있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아직도 드러나지 않은 진실이 많다며, 그 진실은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의 용기에서 시작될 수 있다고 말했다.

광주 5.18 민주화운동 당시 홍금숙씨는 고등학교 1년생이었다. 그녀는 오빠가 시민군으로 참여해 집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을 때 오빠를 찾으러 갔다가 길을 잃었다. 문득 집에 돌아가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우여곡절 끝에 올라탄 버스는 길을 가다 계엄군에 의해 무자비한 총격을 당했다. 18명의 탑승자가운데 그녀만이 유일한 생존자이다. 그녀는 왜 자신만이 생존자가 되었는지 이 운명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덤덤하게 이야기하였다. 자신을 살려준 군인들이, 혹 5.18이후 주남마을 학살사건을 통제하기 위해 직간접적으로 협박하거나 회유하는 안기부 직원들이 언제든 생명을 위협할지 모르기에 두려움 가운데 오랜 기간 숨죽이며 살아왔지만 이제는 스스로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고 오늘 같은 자리는 정말 의미 있는 자리가 아니겠냐며 그녀는 증언자로 온 최씨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양성주씨는 광주에 온 만큼 광주와의 인연을 얘기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1988년부터 90년까지 그는 광주에서 전경으로 근무했다. 그때 그는 학생들의 시위를 진압하며 쉽게 말해 ‘빨갱이’를 잡는 역할을 했다. 그때만 해도 그는 부모의 뒷바라지로 아픔 없이 건강하게 성장한 청년이었다. 훗날 우연히 그는 가족사를 찾아보는 가운데 4.3사건으로 희생된 할아버지의 역사를 살펴보게 되었다. 그렇게 제주 4.3과 마주한 그는 아버지의 생존전략이 ‘기억의 자살’이었다고 말했다. 그의 아버지는 생존을 위해 제주 4.3사건의 기억을 잊으며 체제에 순응하며 자녀를 키웠다. 스스로 고통의 기억을 지운 채 살아온 아버지였던 것이다. 젊은 날 광주에서 자신이 ‘빨갱이’로 욕하던 그 사람이 사실은 ‘나의 가족’이었다는 걸 알아차리게 된 이후 그는 제주 4.3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해 운동해왔다. 그는 제주 4.3사건의 유족회 사무국장으로 작년까지 활동해왔다.

여순사건 당시 9살이었던 황순경씨는 많은 연세에도 불구하고 또렷한 목소리로 참여자들에게 여순사건을 소개했다.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19일 이승만 정부가 여수에 주둔하고 있는 군부대에 제주 4.3의 진압 명령을 내렸지만, 자국민을 향한 진압은 부당한 명령이라 판단한 군부대가 명령을 거부하여 일어난 사건이다. 이후 사건을 진압하는 군인과 경찰에 의해 누명당하거나 희생당한 사람들이 11,000여명이 된다. 사건 당시 그의 외삼촌과 친형님 2명을 잃었다. 여수 앞바다에서 총살되어 수장된 잔인한 71년을 유족들이 고통스럽게 살아왔다. 국가는 여순사건에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 않다. 그렇기에 지금도 진상규명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김낙영씨는 베트남전에 참전한 군인이었다. 그는 박격 포수였는데 소총수로 사람을 직접보고 쏴 죽이는 일을 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포는 거리를 두고 쏘기에 보이지 않는 포탄 낙하로 얼마나 많은 이들이 피해를 입었는지 직접 알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작전을 나가기 전 그는 기도했다. 살아만 있게 해달라고. 그러나 작전을 위해 나가면 살아있는 순간이 고통스러워 제일 먼저 총알에 맞게 해달라고 기도의 내용이 바뀌었다. 그는 귀국 후 트라우마에 힘든 시간을 보내왔다. 참전 이후 삶이 바뀐 느낌이 든다고 했다. 전쟁을 통해 추악한 인간의 본질을 보았다며 무소유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삶의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고.

전체 서클에서 미처 이야기하지 못한 내용은 소그룹 서클로 나뉘어 대화를 이어갔다. 소그룹 서클은 연세가 많은 여수사건의 당사자를 제외한 광주민주화운동, 제주 4.3사건, 베트남 전쟁으로 나뉘어 고루 참여자들이 소그룹에서 증언자와 소통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필자는 제주 4.3사건을 이야기하는 양성주씨, 7명의 참여자와 함께 대화하는 소그룹 서클을 이끌었다. 소그룹 서클에서는 전체 이야기를 들으며 느낀 감정과 양성주씨의 못다 한 이야기, 참여자의 질문과 대답으로 토킹스틱을 통해 한 사람씩 차례로 대화를 나누었다. 서클에서 자연스럽게 더 깊이 제주 4.3사건으로 들어가 볼 수 있었고 70년이 흘러 그 사건이 우리 시대와 세대에 전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의 일상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를 돌아볼 수 있었다.

각자 다른 사건을 이야기했지만 모두가 거대한 폭력 앞에 무기력을 경험한 희생자였다. 각자 다른 경험을 이야기했지만 우리 모두가 함께 아파했다. 그렇게 모두의 마음을 잇는 시간이었다. 다시 전체서클로 모인 자리에서 증언자들은 이야기를 경청해준 모든 참여자에게 고마움을 표현했다. 이렇게 모이기 어려운 자리이고 한 사람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함께 증언하고 대화할 수 있었던 이번 시간이 역사의 당사자들에게도 특별한 시간과 경험이었다고 나누었다. 당사자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었다는 것만으로도 청중들에게 진심 어린 감사를 표현했을 때는 오히려 그동안 관심을 두지 않고 이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았던 것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당사자들의 다른 소감에서도 나왔지만 이번의 대화가 사실 첫 시작의 자리였지만 앞으로 이런 대화가 진전되고 더 많은 기회를 통해 고통을 마주하고 연대하며 치유하는 기회가 생기리라 기대한다.

많은 사람들이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전두환 씨로 대표되는 책임자의 처벌과 진상규명을 생각하게 된다. 안타깝게도 광주민주화운동의 정신을 폄훼하고 망언을 그치지 않는 자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당연히 그 망언은 규탄되고 사라져야만 한다. 우리 사회가 처벌로 대표되는 책임을 외치는 사이 당사자 한 명 한 명의 경험과 목소리, 나아가 그분들의 존재와 정체성은 거대담론 아래 묻히거나 소외되곤 한다. 이번 대화모임과 같은 ‘회복적 접근’은 개인과 집단 간의 갈등해결을 넘어 전쟁과 국가적 폭력과 같은 분쟁과 갈등의 접근에도 치유와 상생의 길을 내고 있다.

역사적인 갈등에서의 ‘회복적 접근’은 거대한 힘 앞에 억눌렸던 당사자의 목소리를 찾아가는 기회를 얻는 동시에 우리가 살아가는 현시대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고자 하는 공동체 구성원의 자세를 배울 수 있는 자리였다. 얼굴과 얼굴을 마주한 대화는 힘이 크다. 전쟁과 국가폭력 당사자의 증언에 힘이 실리고 목소리가 드러나려면 공동체가 함께 듣는다는 전제 가운데 가능하다. 아직 국내 자체에서는 시도 자체가 희소하고 대중들의 인식이 회복적 정의의 이해보다는 국가폭력의 피해자와 가해자가 만난다는 하나의 이슈로만 소비되는 모습이 때로는 누구에게도 안전하지 않은 공간을 초래하기도 한다. ‘네가 있기에 내가 있고, 우리가 있기에 네가 있다’는 아프리카 격언인 ‘우분투’의 지혜와 같이 고통을 마주한 그들 곁에서 함께 하는 것이 우리가 마땅히 기울여야 할 노력과 실천이 아닐까. 고통을 함께 마주할 때, 과거의 상처를 치유로, 다음 세대에게 평화를 선물과 같이 유산으로 남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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